definition |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 조선시대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서울지역의 대표적인 [마을](/topic/마을)당. 이 당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272[번지](/topic/번지)에 있으며, 2008년 7월 22일에 중요민속자료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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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양종승 |
정의 | 비운의 운명을 맞이한 조선시대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서울지역의 대표적인 [마을](/topic/마을)당. 이 당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272[번지](/topic/번지)에 있으며, 2008년 7월 22일에 중요민속자료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 내용 | 서울에는 원래 진관외동을 비롯하여 망원동, 월계동 등 세 곳에 금성당이 있었지만 모두 1970~1980년대 도시개발에 의해 자취를 감추고 구파발 금성당만 유일하게 남았다. 이 당들은 한때 서울 지역민과 유명 만신들로부터 추앙받던 성스러운 공간이었고, [마을](/topic/마을) 주민들이 대동하여 굿을 거행하는 마을당 역할을 했다. 이 뿐 아니라 지역 무당들이 개인적 굿을 하는 공공 굿당의 역할을 하면서도 조선 말기에 궁중 여인들도 이곳 금성당에서 기복적 신앙행위를 했을 정도로 유명했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세종 8년(1426)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 세조 3년(1457) 32세의 나이로 죽었다. 아버지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심씨 사이에 태어나 8살 때인 1433년에 금성대군으로 봉해졌다. 단종의 숙부이자 세조(世祖)의 아우인 금성대군은 죽은 지 334년이 지난 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할 때인 정조 15년(1791)에 [육종](/topic/육종)영(六宗英)의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영주의 성인단(成仁壇), 괴산(청안)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휘자는 유(瑜)이고,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어릴 적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았던 금성대군은 조카의 왕위를 노리는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1468)의 모함으로 단종 3년(1455) 삭녕(朔寧)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移配)되었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핍박하여 왕위를 수선한 이듬해에는 [성삼문](/topic/성삼문)(成三問, 1418~1456)•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실패로 금성대군은 광주에서 다시 영주 순흥으로 유배됐다. 이곳에서 부사 이보흠(李甫欽, ?~1457) 등과 모의하여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세조 3년(1457)에 사사(賜死)되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금성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금성대군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오늘날 영주 순흥 두렛골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이 되면 금성대군의 충(忠)과 의(義)를 기리는 대동놀이가 매년 치러지고 있다. 한편 전국의 무속신앙에서도 금성대군이 신격화되었으며, 특히 서울과 경기 지역의 많은 무당이 그를 영험한 신으로 모시고 있다. 무당에 따라서는 [몸주신](/topic/몸주신)으로 모시기도 하며, 마을 곳곳에서는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그를 추모하며 기복을 비는 당굿을 정기적으로 행하고 있다. 금성당에서는 당 지킴이를 시봉자라고 한다. 송은영도 자신을 시봉자라고 하고, 여기서 하는 일을 가리켜 “시봉 든다”라고 한다. 송은영은 1925년 1월 14일(양력) 서울특별시 서[대문](/topic/대문)구 홍파동에서 태어났다.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스무 살 되던 해에 금성당집으로 시집을 왔다. 송은영이 금성당집으로 시집을 왔을 때는 그녀의 시어머니가 시할머니의 금성당 일을 돕고 있었다. 송은영도 시어머니와 시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금성당과 관련한 일을 따라하면서 배웠다. 송은영의 시할머니 박윤수는 그녀의 친정어머니 신씨로부터 금성당 시봉자 역할을 물려받았다. 시할머니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송은영의 시어머니 이정숙은 진관외동 인근 북한산 자락에서 태어나 금성당집으로 시집을 왔으며, 남편은 농사일을 하였다. 송은영의 시할머니는 송은영이 시집 온 지 5년 후에 사망하였다. 시할머니가 사망하자 송은영은 시어머니를 도와 금성당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86세에 사망하였다. 이와 같이 이곳 금성당 시봉자 역할은 친정어머니 또는 시어머니로부터 대물림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당지기 송은영이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윗대의 시봉자들은 신씨(여), 박윤수(여), 이정숙(여)이며, 이와 같이 금성당 시봉자는 송은영까지 모계 대물림으로 4대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 이곳 아랫금성당에는 많은 [단골](/topic/단골)이 매여 있어 굿이 늘 있었다. 단골들이 굿을 하면 먼저 금성당에 찾아와 시봉자에게 굿돈을 내고 날을 잡는다. 그러면 당지기가 모든 음식을 장만하고 굿할 만신과 [악사](/topic/악사)들을 불러온다. 당지기는 곧 당주 역할을 한 것이다. 굿을 할 만신들은 이곳과 가까운 영천과 구파발에서 데려 왔다. 과거 영천과 구파발에는 유명 만신이 대거 거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옛 단골들이 금성당을 찾아와 굿을 요청할 때가 있지만 흔치 않다. 금성당 단골이 굿을 할 때 밖에 나가서 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송은영도 금성당 내부에 보관하고 있는 신복과 악기들을 [가지](/topic/가지)고 간다. 그리고 굿은 금성당의 신복과 악기들을 사용한다. 송은영은 굿을 하는 도중에 [제금](/topic/제금)을 치는 등 이 일 저 일을 돕는다. 굿돈을 셈할 때는 큰 만신들과 다를 바 없이 한몫을 받는다. 송은영은 만신들이 [재가집](/topic/재가집) 굿을 맡아 이곳 금성당에 와서 굿을 하면 식사 준비를 해준다. 굿 음식은 만신들이 직접 준비해 온다. 굿이 끝나면 굿당비를 내고 간다. 과거에는 이곳 금성당을 찾는 신도가 많아 쉴 새가 없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마지를 올리곤 하였다. 그 만큼 정성을 들이러 오는 사람이 많았고, 큰굿도 자주 있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금성당에서는 일년 내내 행사가 이어졌다. 정월 [홍[수맥](/topic/수맥)이](/topic/홍수맥이)를 시작으로 음력 3월 24일 금성님 탄생일 맞이, 7월 칠석맞이 등 사시사철 중요한 행사들이 있었다. 특히 금성님 탄생일에는 덕욱 정성껏 행사를 치렀다. 대부분의 단골들은 음력 정월 보름 안에 찾아온다. 아직도 전국에 흩여져 있는 당골들이 매년 찾아오긴 하지만 10여 명에 불과하다. 가끔 진관외동에 거주하는 동네 사람들이 연초에 이곳을 찾곤 한다. 한편 금성당을 오래전부터 다니던 만신들은 아직도 진적을 드리거나 새 제자를 내게 되면 이곳에 와서 금성님께 물고를 받아간다. [내림굿](/topic/내림굿)을 받을 제자들이 금성님을 선몽하여 이곳에 와 물고를 받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곳 구파발 아랫금성당에는 원래 금성님, 맹인도사, 맹[인삼](/topic/인삼)신마누라, 삼궁애기씨, 중불사, 창부광대씨, 별상님, 말서낭, 칠성님 두 분, 용[장군](/topic/장군)님, 육대신마누라, 용궁부인, 삼불제석, 부처님, 삼불사할머니 등 총 16점의 무신도가 있었다. 지금은 맹인도사, 맹인삼신마누라, 삼궁애기씨, 중불사, 창부광대씨, 별상님, 말서낭, 삼불사할머니 등 8점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오래전에 도난당하였다. 금성당의 본당과 하당에는 신복을 비롯하여 악기, [촛대](/topic/촛대), 잔, 칼, 명두 등 여러 귀물(鬼物)이 있다. 제단 위에는 각각의 신령님 몫으로 되어 있는 소반, 촛대, 마지그릇이 놓여 있다. [천장](/topic/천장)에는 종이 달려 있고, 천장 [대들보](/topic/대들보) 아래쪽에는 여러 해 묶은 명두와 함께 여러 개의 전이 붙어 있다. | 참고문헌 | 서울 무속과 금성당(錦城堂)의 실체 (양종승, 생활문물연구 15, 국립민속박물관, 2004) 서울 무속의 자존심, 존립 위기에 직면한 금성당·사신성황당 (양종승, 민속소식 119, 국립민속박물관, 2005) 서울은평뉴타운 도시개발사업지구 민속유적학술조사보고서 (금성당·사신당, 상명대학교 박물관·SH공사·(주) 동호, 2006) 서울 구파발 금성당 무속유물 및 민속유물 조사 연구보고서 (서울구파발금성당유물조사단·한국귀신학회·SH공사, 2006) | 형태 | 서울 구파발에는 원래 윗금성당과 아랫금성당 2개의 금성당이 있었다. 현재는 윗금성당이 없어지고 아랫금성당만 있다. 대지 1,296㎡에 총 4채의 집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당집 양식을 갖추고 있다. 건축물 형식은 전면 3칸에 서쪽으로 2칸을 붙여 지은 역 ‘ㄱ’자형이다. 본당 안쪽에 [다락](/topic/다락)방이 붙어 있었으나 촛불이 넘어져 불이 나는 바람에 다락방 부분이 없어졌다. 그때 다락방을 대신하여 방 1칸을 다시 지었다. 본당 정면은 하나로 접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4짝의 격자 문살 [분합문](/topic/분합문)을 좌우로 달아 접어올려 위로 고정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본당 옆으로 하당이 붙어 있고 본당 양옆으로는 새롭게 조성한 [살림집](/topic/살림집)이 붙어 있다. 오른편의 살림집에는 시봉자 송은영(宋恩榮)이 거주하고 있고 왼편에는 세입자가 산다. 본당 앞면 우측으로는 또 다른 [기와](/topic/기와) 건축물이 있다. 이곳에는 당주의 아들 가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초가집](/topic/초가집)이었지만 1970년 아들이 결혼하면서 현재의 기와로 바뀌었다. 금성당의 대지와 건물의 법적 권리자는 큰아들이다. 금성당 건축물 관리는 송은영이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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