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동해리산신제

한국무속신앙사전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에서 매년 음력 시월 초사흘에 [마을](/topic/마을)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행하는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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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에서 매년 음력 시월 초사흘에 [마을](/topic/마을)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행하는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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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복
정의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에서 매년 음력 시월 초사흘에 [마을](/topic/마을)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행하는 의례.
정의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동해리에서 매년 음력 시월 초사흘에 [마을](/topic/마을)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행하는 의례.
상호참조[공주동해리산향계문서](/topic/공주동해리산향계문서)(95쪽)
참고문헌공주지방의 민속신앙 (공주문화원, 1995)
공주 동해리 산향계의 성립과 산신제( (강성복, 2010년 제28차 한국무속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한국무속학회, 2010)
상호참조[공주동해리산향계문서](/topic/공주동해리산향계문서)(95쪽)
참고문헌공주지방의 민속신앙 (공주문화원, 1995)
공주 동해리 산향계의 성립과 산신제( (강성복, 2010년 제28차 한국무속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한국무속학회, 2010)
내용동해리산제당은 본래 재궁동 7부 능선에 위치했다. 재궁동은 동해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topic/마을)이며 산신제 역시 이곳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당은 본래 특별한 당집이나 신체(神體)를 [봉안](/topic/봉안)하지 않은 자연제당으로서, 단지 바위 앞에 평편하게 다져 놓은 제단이었다. 그러나 마을이 점점 커지면서 두 차례나 산제당을 옮기는 과정을 거친 끝에 마을 앞 도깨비바위 곁에 부지를 매입하여 1985년에 이건하였다. 산제당이 위치한 곳은 [풍수](/topic/풍수)설에서 ‘혈식천추(血食千秋)’, 즉 피제사 천년을 받들 터전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매년 그 옆에서 희생으로 바칠 황소의 도살이 이루어진다.

1. 제일 택일 : 제일은 해마다 음력 시월 초에 길일로 택했다. 그러나 제를 앞두고 초상이나 출산이 발생하면 날짜를 연기해야 하는 탓에 어려움이 많았다. 심지어 개, 돼지, 소가 새끼를 낳아도 부정하다 하여 날짜를 연기했다. 그러다 보니 늦어져서 11월에 산신제를 지낸 해도 있다. 이로 말미암아 산향계의 결의를 거쳐 1954년부터 매년 시월 초삼일로 고정하게 되었다. 또한 제일을 고정한 이후에는 설령 부정한 일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산신제를 지낸다. 이 때문에 제를 앞두고 집안에 부정한 일이 생긴 사람은 함구하고 있다가 산신제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린다고 한다. 제의기간 사흘 동안에 초상이 나면 해당 마을에서만 산신제에 참석하지 못할 뿐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된다.

2. 공양주·[제관](/topic/제관)·축관 : 제관은 부정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공양주(供養主), 제관, 축관을 선정한다. 제관은 시월 초하루부터 찬물로 목욕재계 하는 등 엄격하게 금기를 지켜야 한다. 특히 제물을 준비하는 공양주의 금기는 매우 까다롭다. 이 때문에 공양주는 [대문](/topic/대문) 밖 출입을 일절 금한 채 사흘 동안 정성을 들여야 한다. 마을에서도 산신제가 임박하면 부정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마을 전체가 매사에 조심하고, 산신제를 마칠 때까지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다.

3. 산향계 통문 : 산신제 사흘 전에 산향계에서는 통문(通文)을 발송하여 모든 계원이 성심재계(誠心齋戒)하고 상호간에 다투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당부한다. 통문에는 치성기간 및 금기사항, 공양주·제관·축관 명단, 산제당의 개초(蓋草, 이엉으로 [지붕](/topic/지붕)을 임) 당번 등이 기재된다. 특히 통문에는 통문을 보는 즉시 [동물](/topic/동물)의 살상 도구를 봉인하고, 치성기간인 음력 시월 초하룻날부터 초사흗날까지는 험담과 싸움을 금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와 함께 산제당의 개초를 맡은 마을은 상주를 제외하고 짚단 한두 단씩을 [가지](/topic/가지)고 나와 작업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부정을 엄격하게 가리는 산신제의 전통은 지금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그리하여 추수가 이루어지는 기간임에도 산신제를 준비하는 사흘 동안에는 마을에서 기계소리를 내는 것조차 부정하게 여겨 [방아](/topic/방아) 찧는 일도 금기시한다.

4. 제물의 준비 : 동해리산신제는 산향계에서 주관한다. 산향계는 이장이 의무적으로 계장이 되고, 자연촌 단위의 반장이 간사가 된다. 계장은 매년 9월 상순에 간사들만 참여하는 임시회의를 소집하여 계원들이 납부할 헌성금(獻誠金) 액수를 결정한다. 아울러 각 마을의 간사가 집집마다 헌성금을 수합하면 계원 중에 적당한 사람으로 순색모우(純色牡牛)를 구입할 매우인(買牛人)과 이 소를 임시로 먹일 사육인(飼育人)을 선정한다. 여기에서 순색모우는 잡털이 박히지 않은 황소를 말한다. 단 뿔이나 꼬리가 빠진 소는 안 되고, 비육이 좋은 것으로 하되 값을 흥정하지 않아야 한다. 예전에는 공주장이나 인근의 5일장에서 주로 소를 구입했지만, 희생물로 사용할 소를 고르는 일이 쉽지 않은 까닭에 간혹 연[기장](/topic/기장)까지 왕복 100리가 넘는 발품을 팔기도 했다.

산신제의 제물은 희생으로 바칠 황소를 비롯하여 삼색실과, 떡, 메, 술, 북어, 탕, 다시마, [메밀](/topic/메밀)범벅 등이다. 모든 제물은 공양주가 손수 마련하지만 황소의 도살은 부정이 없는 사람 중에서 별도의 인원을 선정한다. 이때 도살된 희생물 가운데 땅에 닿은 절반 부분은 부정하다 하여 쓰지 않고 하늘로 향한 상향편을 열두 가지 부위로 해체하여 진설한다. 산신제에 올리는 부위는 쇠머리, 우족, 장골, 흉골, 갈비, 등심, 안심옥, 외심옥, 간, 지라, 심통 등이다.

5. 산신제 : 희생의 도살과 제수 준비가 다 되면 공양주, 제관, 축관은 [두루마기](/topic/두루마기)로 갈아입고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산제당으로 향한다. 제장에 도착하면 공양주는 쌀을 씻어 화톳불에 메를 짓는다. 같은 시각 산제당 밑에 묻어 놓은 술독을 꺼내 용수로 제주를 걸러 동이에 담는다. 이윽고 산제당 곁에 있는 도깨비바위에 메밀범벅을 올려놓고 간단하게 [고사](/topic/고사)를 지낸다. 이는 혹시 깃들었을지도 모를 잡귀와 도깨비를 위무하고 제어함으로써 제장을 정화하기 위한 일종의 [부정풀이](/topic/부정풀이) 의식이다. 산신제는 유교식 제차에 의거하여 [분향](/topic/분향)-[헌작](/topic/헌작)-[독축](/topic/독축)-[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사신-[음복](/topic/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절차인 소지는 맨 먼저 동해동산신령(洞海洞山神靈)을 올린 다음 동해대동(洞海大洞), 사곡면장, 사곡면지서장, 이장, 공양주·제관·축관, 장로(長老), 계원일동, 입대자 등 순으로 불사른다. 이때 소지를 올리는 제관과 축관은 [사전](/topic/사전)에 작성된 명단에 의거하여 한 사람씩 차례로 “이 소지는 ○○생 아무개 소지입니다”라고 아뢴 다음 당사자의 가내 평안을 고사덕담 형식으로 축원한다.

6. 희생의 분육 및 경매 : 산신제를 마치면 당일 저녁에 희생으로 올린 황소를 공양주의 집으로 옮겨 헌성금을 낸 계원들에게 두세 근씩 분육(分肉)한다. 이를 ‘주비끼’라고 한다. 주비끼는 다섯 가구를 1조로 하여 고기를 나누어 주면 다시 다섯 집이 고기를 나누어 갖는 독특한 분육 방식이다. 산향계원의 수가 150여 명이다 보니 대략 30주비끼 안팎의 분육조로 구성된다. 이때 산신제에 헌신한 공양주, 제관, 축관 및 도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분육예차(分肉例次)’에 따라 그동안의 노고에 보답하는 뜻으로 고기를 조금 더 준다.

분육을 마치면 소의 뼈, [가죽](/topic/가죽), 장기 등은 즉석 경매를 통해 매각한다. 경매가 시작되면 어시장을 방불케 하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마을 사람들은 가격이 조금 비싸도 산신제에 올린 희생물은 재수가 좋다고 여겨 다투어 경매에 임한다. 판매되는 부위는 우두(牛頭), 장골(長骨), 소골(掃骨), 항골(項骨), 흉골(胸骨), 방골(肪骨), 두태(豆太), 간(肝), 처녑[千葉], 허파[肺], 심통(心痛), 우미(牛尾), 우각(牛脚), 우피(牛皮), 협(脇), 전족(前足), 후족(後足), 전경골(前脛骨), 후경골(後脛骨), 쓸개[胆], 지방(脂肪), 세목(細目), 대소장(大小腸), 지라[脾] 등이다. 희생의 매각 대금은 공동기금으로 예치하며, 매년 그 금액이 상당하여 산향계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고 있다. 밤이 늦도록 경매가 끝나면 주민들은 함께 음복을 나누고, 이튿날 산향계 임원들만 다시 공양주의 집에서 모여 조촐하게 주연을 베풀며 비용을 결산한다.
내용동해리산제당은 본래 재궁동 7부 능선에 위치했다. 재궁동은 동해리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topic/마을)이며 산신제 역시 이곳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당은 본래 특별한 당집이나 신체(神體)를 [봉안](/topic/봉안)하지 않은 자연제당으로서, 단지 바위 앞에 평편하게 다져 놓은 제단이었다. 그러나 마을이 점점 커지면서 두 차례나 산제당을 옮기는 과정을 거친 끝에 마을 앞 도깨비바위 곁에 부지를 매입하여 1985년에 이건하였다. 산제당이 위치한 곳은 [풍수](/topic/풍수)설에서 ‘혈식천추(血食千秋)’, 즉 피제사 천년을 받들 터전으로 구전되고 있으며, 매년 그 옆에서 희생으로 바칠 황소의 도살이 이루어진다.

1. 제일 택일 : 제일은 해마다 음력 시월 초에 길일로 택했다. 그러나 제를 앞두고 초상이나 출산이 발생하면 날짜를 연기해야 하는 탓에 어려움이 많았다. 심지어 개, 돼지, 소가 새끼를 낳아도 부정하다 하여 날짜를 연기했다. 그러다 보니 늦어져서 11월에 산신제를 지낸 해도 있다. 이로 말미암아 산향계의 결의를 거쳐 1954년부터 매년 시월 초삼일로 고정하게 되었다. 또한 제일을 고정한 이후에는 설령 부정한 일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산신제를 지낸다. 이 때문에 제를 앞두고 집안에 부정한 일이 생긴 사람은 함구하고 있다가 산신제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린다고 한다. 제의기간 사흘 동안에 초상이 나면 해당 마을에서만 산신제에 참석하지 못할 뿐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된다.

2. 공양주·[제관](/topic/제관)·축관 : 제관은 부정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생기복덕](/topic/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공양주(供養主), 제관, 축관을 선정한다. 제관은 시월 초하루부터 찬물로 목욕재계 하는 등 엄격하게 금기를 지켜야 한다. 특히 제물을 준비하는 공양주의 금기는 매우 까다롭다. 이 때문에 공양주는 [대문](/topic/대문) 밖 출입을 일절 금한 채 사흘 동안 정성을 들여야 한다. 마을에서도 산신제가 임박하면 부정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마을 전체가 매사에 조심하고, 산신제를 마칠 때까지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다.

3. 산향계 통문 : 산신제 사흘 전에 산향계에서는 통문(通文)을 발송하여 모든 계원이 성심재계(誠心齋戒)하고 상호간에 다투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당부한다. 통문에는 치성기간 및 금기사항, 공양주·제관·축관 명단, 산제당의 개초(蓋草, 이엉으로 [지붕](/topic/지붕)을 임) 당번 등이 기재된다. 특히 통문에는 통문을 보는 즉시 [동물](/topic/동물)의 살상 도구를 봉인하고, 치성기간인 음력 시월 초하룻날부터 초사흗날까지는 험담과 싸움을 금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와 함께 산제당의 개초를 맡은 마을은 상주를 제외하고 짚단 한두 단씩을 [가지](/topic/가지)고 나와 작업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처럼 부정을 엄격하게 가리는 산신제의 전통은 지금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그리하여 추수가 이루어지는 기간임에도 산신제를 준비하는 사흘 동안에는 마을에서 기계소리를 내는 것조차 부정하게 여겨 [방아](/topic/방아) 찧는 일도 금기시한다.

4. 제물의 준비 : 동해리산신제는 산향계에서 주관한다. 산향계는 이장이 의무적으로 계장이 되고, 자연촌 단위의 반장이 간사가 된다. 계장은 매년 9월 상순에 간사들만 참여하는 임시회의를 소집하여 계원들이 납부할 헌성금(獻誠金) 액수를 결정한다. 아울러 각 마을의 간사가 집집마다 헌성금을 수합하면 계원 중에 적당한 사람으로 순색모우(純色牡牛)를 구입할 매우인(買牛人)과 이 소를 임시로 먹일 사육인(飼育人)을 선정한다. 여기에서 순색모우는 잡털이 박히지 않은 황소를 말한다. 단 뿔이나 꼬리가 빠진 소는 안 되고, 비육이 좋은 것으로 하되 값을 흥정하지 않아야 한다. 예전에는 공주장이나 인근의 5일장에서 주로 소를 구입했지만, 희생물로 사용할 소를 고르는 일이 쉽지 않은 까닭에 간혹 연[기장](/topic/기장)까지 왕복 100리가 넘는 발품을 팔기도 했다.

산신제의 제물은 희생으로 바칠 황소를 비롯하여 삼색실과, 떡, 메, 술, 북어, 탕, 다시마, [메밀](/topic/메밀)범벅 등이다. 모든 제물은 공양주가 손수 마련하지만 황소의 도살은 부정이 없는 사람 중에서 별도의 인원을 선정한다. 이때 도살된 희생물 가운데 땅에 닿은 절반 부분은 부정하다 하여 쓰지 않고 하늘로 향한 상향편을 열두 가지 부위로 해체하여 진설한다. 산신제에 올리는 부위는 쇠머리, 우족, 장골, 흉골, 갈비, 등심, 안심옥, 외심옥, 간, 지라, 심통 등이다.

5. 산신제 : 희생의 도살과 제수 준비가 다 되면 공양주, 제관, 축관은 [두루마기](/topic/두루마기)로 갈아입고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산제당으로 향한다. 제장에 도착하면 공양주는 쌀을 씻어 화톳불에 메를 짓는다. 같은 시각 산제당 밑에 묻어 놓은 술독을 꺼내 용수로 제주를 걸러 동이에 담는다. 이윽고 산제당 곁에 있는 도깨비바위에 메밀범벅을 올려놓고 간단하게 [고사](/topic/고사)를 지낸다. 이는 혹시 깃들었을지도 모를 잡귀와 도깨비를 위무하고 제어함으로써 제장을 정화하기 위한 일종의 [부정풀이](/topic/부정풀이) 의식이다. 산신제는 유교식 제차에 의거하여 [분향](/topic/분향)-[헌작](/topic/헌작)-[독축](/topic/독축)-[아헌](/topic/아헌)-[종헌](/topic/종헌)-사신-[음복](/topic/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마지막 절차인 소지는 맨 먼저 동해동산신령(洞海洞山神靈)을 올린 다음 동해대동(洞海大洞), 사곡면장, 사곡면지서장, 이장, 공양주·제관·축관, 장로(長老), 계원일동, 입대자 등 순으로 불사른다. 이때 소지를 올리는 제관과 축관은 [사전](/topic/사전)에 작성된 명단에 의거하여 한 사람씩 차례로 “이 소지는 ○○생 아무개 소지입니다”라고 아뢴 다음 당사자의 가내 평안을 고사덕담 형식으로 축원한다.

6. 희생의 분육 및 경매 : 산신제를 마치면 당일 저녁에 희생으로 올린 황소를 공양주의 집으로 옮겨 헌성금을 낸 계원들에게 두세 근씩 분육(分肉)한다. 이를 ‘주비끼’라고 한다. 주비끼는 다섯 가구를 1조로 하여 고기를 나누어 주면 다시 다섯 집이 고기를 나누어 갖는 독특한 분육 방식이다. 산향계원의 수가 150여 명이다 보니 대략 30주비끼 안팎의 분육조로 구성된다. 이때 산신제에 헌신한 공양주, 제관, 축관 및 도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분육예차(分肉例次)’에 따라 그동안의 노고에 보답하는 뜻으로 고기를 조금 더 준다.

분육을 마치면 소의 뼈, [가죽](/topic/가죽), 장기 등은 즉석 경매를 통해 매각한다. 경매가 시작되면 어시장을 방불케 하는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마을 사람들은 가격이 조금 비싸도 산신제에 올린 희생물은 재수가 좋다고 여겨 다투어 경매에 임한다. 판매되는 부위는 우두(牛頭), 장골(長骨), 소골(掃骨), 항골(項骨), 흉골(胸骨), 방골(肪骨), 두태(豆太), 간(肝), 처녑[千葉], 허파[肺], 심통(心痛), 우미(牛尾), 우각(牛脚), 우피(牛皮), 협(脇), 전족(前足), 후족(後足), 전경골(前脛骨), 후경골(後脛骨), 쓸개[胆], 지방(脂肪), 세목(細目), 대소장(大小腸), 지라[脾] 등이다. 희생의 매각 대금은 공동기금으로 예치하며, 매년 그 금액이 상당하여 산향계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고 있다. 밤이 늦도록 경매가 끝나면 주민들은 함께 음복을 나누고, 이튿날 산향계 임원들만 다시 공양주의 집에서 모여 조촐하게 주연을 베풀며 비용을 결산한다.
역사동해리산신제의 역사는 분명치 않지만 조선 후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제임이 분명하다. 구전에 따르면 이 [마을](/topic/마을)은 옛날에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이 극성을 부려 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다. 주민들은 함정을 파고 호표(虎豹)를 퇴치하려 하였으나 아무런 효험을 거두지 못했다. 이에 주민들은 호랑이가 산신령의 사자(使者)라고 여겨 제당을 마련하고 매년 산신제를 지내자 신기하게도 호표의 출몰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 뒤로 산신제에 더욱 치성을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동해리에서 산신제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19세기 후반에 중수되는 산향계(山饗稧) 자료이다. 동해리 산향계는 산신제를 주관하기 위하여 결성된 마을의 자치 조직으로, 1885년 3개 항의 범례를 정하고 상계원과 하계원의 좌목(座目) 명단을 재정비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 적시된 범례는 ‘① 산제일에 상하계원은 마땅히 [재계](/topic/재계)(齋戒)하고 모여서 치성을 드리되 소홀함이 없도록 할 것 ② 이 계의 규칙은 다른 계보다 더욱 소중함이 있으니 특별히 계에 힘씀이 마땅할 것 ③ [축문](/topic/축문)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축문을 사용하되 정성껏 읽을 것’ 등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동해리산신제는 늦어도 18세기부터 지속되어 온 의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동해리를 비롯한 주변 마을의 보편적인 관행으로 보인다. 즉 태화산 기슭에 위치한 동해리는 첩첩산중의 두메로서 ‘하늘 아래 끝 동네’라고 해도 지나치치 않을 만큼 공주에서 가장 궁벽한 산간마을로 손꼽힌다. 일찍이 정감록에서는 ‘유마양수지간(維麻兩水之間)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 즉 유구와 마곡사 양수지간에 만인을 살릴 [십승지](/topic/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그 비결을 믿고 많은 사람이 병화(病禍)를 면할 수 있는 태화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한말에 갑오[농민](/topic/농민)혁명의 도화선을 제공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은신한 곳도 동해리 선학동이었다. 이렇듯 태화산 기슭에 터전을 마련한 주민들은 예부터 그 산신을 매우 영험하게 생각하여 해마다 호환(虎患)을 막고 역질(疫疾)이 소멸되기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 왔다. 이러한 사실은 1930년에 새롭게 제정되는 산향계 규약에 “본계의 설립 목적은 동해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산신의 가호[神賴之澤]를 입을 목적으로 설립한다”라는 구절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역사동해리산신제의 역사는 분명치 않지만 조선 후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제임이 분명하다. 구전에 따르면 이 [마을](/topic/마을)은 옛날에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이 극성을 부려 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다. 주민들은 함정을 파고 호표(虎豹)를 퇴치하려 하였으나 아무런 효험을 거두지 못했다. 이에 주민들은 호랑이가 산신령의 사자(使者)라고 여겨 제당을 마련하고 매년 산신제를 지내자 신기하게도 호표의 출몰은 자취를 감추었고, 그 뒤로 산신제에 더욱 치성을 드리게 되었다고 한다.

동해리에서 산신제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19세기 후반에 중수되는 산향계(山饗稧) 자료이다. 동해리 산향계는 산신제를 주관하기 위하여 결성된 마을의 자치 조직으로, 1885년 3개 항의 범례를 정하고 상계원과 하계원의 좌목(座目) 명단을 재정비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 적시된 범례는 ‘① 산제일에 상하계원은 마땅히 [재계](/topic/재계)(齋戒)하고 모여서 치성을 드리되 소홀함이 없도록 할 것 ② 이 계의 규칙은 다른 계보다 더욱 소중함이 있으니 특별히 계에 힘씀이 마땅할 것 ③ [축문](/topic/축문)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축문을 사용하되 정성껏 읽을 것’ 등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동해리산신제는 늦어도 18세기부터 지속되어 온 의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동해리를 비롯한 주변 마을의 보편적인 관행으로 보인다. 즉 태화산 기슭에 위치한 동해리는 첩첩산중의 두메로서 ‘하늘 아래 끝 동네’라고 해도 지나치치 않을 만큼 공주에서 가장 궁벽한 산간마을로 손꼽힌다. 일찍이 정감록에서는 ‘유마양수지간(維麻兩水之間)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 즉 유구와 마곡사 양수지간에 만인을 살릴 [십승지](/topic/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그 비결을 믿고 많은 사람이 병화(病禍)를 면할 수 있는 태화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한말에 갑오[농민](/topic/농민)혁명의 도화선을 제공한 고부군수 조병갑이 은신한 곳도 동해리 선학동이었다. 이렇듯 태화산 기슭에 터전을 마련한 주민들은 예부터 그 산신을 매우 영험하게 생각하여 해마다 호환(虎患)을 막고 역질(疫疾)이 소멸되기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 왔다. 이러한 사실은 1930년에 새롭게 제정되는 산향계 규약에 “본계의 설립 목적은 동해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산신의 가호[神賴之澤]를 입을 목적으로 설립한다”라는 구절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의의동해리산신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별도의 주관 조직으로 산향계가 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충청 내륙산간 지역에서 동제의 근간을 이루는 산신제는 이제 기능이 크게 약화되어 단순한 제사의식만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동해리에서는 지금도 황소를 희생으로 바치고, 공동체 금기를 엄격하게 준수하는 등 19세기 이래 완고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이면에는 [마을](/topic/마을)의 구성원과 객지로 떠난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산향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곧 산향계는 단지 비용을 부담하고 제를 주관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매년 산신제를 매개로 마을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실질적인 구심체로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산신제 이후에 이루어지는 독특한 희생물의 분육 방식인 주비끼와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즉석 경매는 그 정점에 있다.
의의동해리산신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별도의 주관 조직으로 산향계가 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충청 내륙산간 지역에서 동제의 근간을 이루는 산신제는 이제 기능이 크게 약화되어 단순한 제사의식만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동해리에서는 지금도 황소를 희생으로 바치고, 공동체 금기를 엄격하게 준수하는 등 19세기 이래 완고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이면에는 [마을](/topic/마을)의 구성원과 객지로 떠난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산향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곧 산향계는 단지 비용을 부담하고 제를 주관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매년 산신제를 매개로 마을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실질적인 구심체로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산신제 이후에 이루어지는 독특한 희생물의 분육 방식인 주비끼와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즉석 경매는 그 정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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