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한천리 상연천[마을](/topic/마을) 북쪽의 무성산 산중에 위치한 제당. 목조 [기와집](/topic/기와집)인 이 제당에서 부전동 열두 마을이 합심하여 산신제를 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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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orname | 박종익 |
정의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한천리 상연천[마을](/topic/마을) 북쪽의 무성산 산중에 위치한 제당. 목조 [기와집](/topic/기와집)인 이 제당에서 부전동 열두 마을이 합심하여 산신제를 지낸다. | 정의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한천리 상연천[마을](/topic/마을) 북쪽의 무성산 산중에 위치한 제당. 목조 [기와집](/topic/기와집)인 이 제당에서 부전동 열두 마을이 합심하여 산신제를 지낸다. | 역사 | 공주무성산산신제는 애초부터 부전대동계가 주체가 되어 시행해 왔다. 현재 발견된 부전대동계의 최초 문서는 『동계좌목(洞稧座目)』으로, 1663년에 작성되었다. 그런데 부전대동계의 문서에 무성산산신제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는 시점은 1839년에 작성된 『부전대동계 입의ㆍ일(浮田大洞稧 立議ㆍ一)』이다. 이 기록은 [제관](/topic/제관)의 지정에 관한 것으로, 그 내용으로 볼 때 정제된 유교식 제사의식으로 산신제가 시행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이 제의가 건물 형태의 제당에서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이에 따라 산제당이 어느 시기부터 존재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부전대동계 임원들의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이미 산제당이 있었다고 한다. 옛 산제당은 2010년 현재의 산제당 인근에 위치하였고, 흙벽돌을 쌓아 지었다고 한다. 초가 형태로 이루어져 매년 개초를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 산제당의 [지붕](/topic/지붕)이 초가 형태를 이루었음은 부전대동계문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부전대동계 계원명부병 수지부[기장](/topic/기장)(浮田大洞稧 稧員名簿竝 收支簿記帳)』의 1950(庚寅)년 기록에는 산제 제수용 비용으로 쌀 아홉 말을 지급하였다고 하면서 이 가운데 “산제당 개초용(山祭堂 蓋草用)으로 1,800원을 사용하였다”고 적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및 그 이후에 한천리 주민들이 이엉계를 조직하여 산제당의 지붕을 개초하였다고 한다. 부전동 열두 [마을](/topic/마을)이 연합하여 지내는 산신제임에도 한천리 사람들이 개초를 도맡은 것은 여러 [가지](/topic/가지) 사정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래 부전대동계는 부전동 열두 마을의 양반들이 중심이 된 동계였다. 이에 따라 한천리 사람은 당시만 하더라도 단 한 명도 계원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천리 사람들의 이엉계를 통한 산제당 개초 이면에는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제당 수리와 관련된 기록이 1977(丁巳)년의『 부전대동계 수지부(浮田大洞稧 收支簿)』에 보인다. 이 문서에는 산제당수축비로 13만 1,240원(金 拾三萬仟貳百四拾원, 山祭堂修築費)을 사용하였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산제당 대지 대금으로 2만 1,000원(金貳萬仟원, 山祭堂 垈地代)을 지출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비용 면으로 보았을 때 이 무렵 산제당에 대한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산제당 대지의 구입이 이때 이루어졌다고 하는 점은 당시 이전만 하더라도 제당이 사유지에 위치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사유지에 산제당이 위치함으로써 산주가 산제당을 홀대하는 일도 발생하였다고 한다. “본래 이 산은 박씨의 산이었다. 박씨는 벌목업자에게 산의 나무를 팔아넘겼다. 벌목꾼들은 이 산의 나무를 베면서 산제당 주변의 노거수만은 베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러자 박씨가 찾아와서 ‘산제당 주변의 나무도 베어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미 당신들에게 판 것인데 왜 안 베어 가느냐?’고 재촉하였다. 벌목꾼들이 ‘이 나무들은 안 베겠다’고 하자 산주가 직접 톱을 들고 나서서 나무를 베었다. 나무를 벤 산주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는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 이후는 그는 말도 못하고 누워서 지냈다. 마을 사람들이 문병을 가서 ‘산제당에 가서 빌어라. 나을 수도 있을지 모르니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라 라고’하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부축을 받으며 산제당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그 이후 그는 일어나서 조금씩 걷게 되었다. 그리고 부전대동계 임원을 찾아와 산제당이 위치한 장소 주변을 대동계에 매매하였다.” 이와 같이 산제당 주변을 훼손해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 일대 주민들은 산신령의 [신벌](/topic/신벌)로 생각한다. 그리고 산주의 속죄를 신령이 받아들여 역시 병을 낫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본래 산제당 주변의 터는 그동안 부전대동계에서 산주에게 여러 차례 매매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산주는 산제당 터만 떼어서 팔 경우 산의 모양이 좋지 않게 된다고 하여 팔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산제당 터를 대동계에 팔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산제당 터는 부전대동계의 자산이 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부전대동계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무성산산신제는 본래 부전동 일대 열두 마을의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지내던 제의였다. 1839년에 작성된 부전동 마을문서『부전대동계 입의ㆍ일』에는 당시 부전동산신제가 격식을 갖춘 유교제례 방식으로 시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 문서에는 “실 제관 세 명과 예비 제관 세명을 동계일에 선정한다”고 적고 있다. 예비 제관은 실 제관 가운데 부정한 일이나 유고가 있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이 중심이 되어 [초헌](/topic/초헌), [독축](/topic/독축), [아헌](/topic/아헌), [종헌](/topic/종헌)의 순으로 제의를 시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이러한 관행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과거 부전대동계가 주관한 무성산산신제는 상ㆍ하당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산신제의 제당인 무성산산제당이 상당이라고 한다면 내산리 입구의 천제(川祭) 제장이 하당이었다. 이 천제 제장은 내산리 입구의 약천내 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상ㆍ하당으로 이루어진 제당은 일제강점기 말부터 상당만이 운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약천내는 부전동 들을 적셔 주는 수원으로, 이 고장의 농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던 시내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부전대동계에서는 물의 독점을 막는 조례를 두기도 하였다. 이처럼 부전동 열두 마을에 농수로서 영향을 미쳐 온 수원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약천내 상류 지역에 제장을 두고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이에 따라 하당에서는 주로 수원의 풍부함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면서 하당 제의가 단절되었다. 상ㆍ하당의 기원 내용이 중첩되기도 하고 두 차례에 걸친 제의 수행이 부담되어 하당 제의를 폐지한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한천저수지준공을 기념하여 한 차례 천제(川祭)를 지냈다. | 참고문헌 | [주당풀이](/topic/주당풀이)와 경문(blog.daum.net/kos8496/16175959) 浮田大洞# 立議 (1972) | 역사 | 공주무성산산신제는 애초부터 부전대동계가 주체가 되어 시행해 왔다. 현재 발견된 부전대동계의 최초 문서는 『동계좌목(洞稧座目)』으로, 1663년에 작성되었다. 그런데 부전대동계의 문서에 무성산산신제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는 시점은 1839년에 작성된 『부전대동계 입의ㆍ일(浮田大洞稧 立議ㆍ一)』이다. 이 기록은 [제관](/topic/제관)의 지정에 관한 것으로, 그 내용으로 볼 때 정제된 유교식 제사의식으로 산신제가 시행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이 제의가 건물 형태의 제당에서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이에 따라 산제당이 어느 시기부터 존재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부전대동계 임원들의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이미 산제당이 있었다고 한다. 옛 산제당은 2010년 현재의 산제당 인근에 위치하였고, 흙벽돌을 쌓아 지었다고 한다. 초가 형태로 이루어져 매년 개초를 하였다는 것이다. 실제 산제당의 [지붕](/topic/지붕)이 초가 형태를 이루었음은 부전대동계문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부전대동계 계원명부병 수지부[기장](/topic/기장)(浮田大洞稧 稧員名簿竝 收支簿記帳)』의 1950(庚寅)년 기록에는 산제 제수용 비용으로 쌀 아홉 말을 지급하였다고 하면서 이 가운데 “산제당 개초용(山祭堂 蓋草用)으로 1,800원을 사용하였다”고 적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및 그 이후에 한천리 주민들이 이엉계를 조직하여 산제당의 지붕을 개초하였다고 한다. 부전동 열두 [마을](/topic/마을)이 연합하여 지내는 산신제임에도 한천리 사람들이 개초를 도맡은 것은 여러 [가지](/topic/가지) 사정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래 부전대동계는 부전동 열두 마을의 양반들이 중심이 된 동계였다. 이에 따라 한천리 사람은 당시만 하더라도 단 한 명도 계원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천리 사람들의 이엉계를 통한 산제당 개초 이면에는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제당 수리와 관련된 기록이 1977(丁巳)년의『 부전대동계 수지부(浮田大洞稧 收支簿)』에 보인다. 이 문서에는 산제당수축비로 13만 1,240원(金 拾三萬仟貳百四拾원, 山祭堂修築費)을 사용하였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산제당 대지 대금으로 2만 1,000원(金貳萬仟원, 山祭堂 垈地代)을 지출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비용 면으로 보았을 때 이 무렵 산제당에 대한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산제당 대지의 구입이 이때 이루어졌다고 하는 점은 당시 이전만 하더라도 제당이 사유지에 위치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사유지에 산제당이 위치함으로써 산주가 산제당을 홀대하는 일도 발생하였다고 한다. “본래 이 산은 박씨의 산이었다. 박씨는 벌목업자에게 산의 나무를 팔아넘겼다. 벌목꾼들은 이 산의 나무를 베면서 산제당 주변의 노거수만은 베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러자 박씨가 찾아와서 ‘산제당 주변의 나무도 베어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미 당신들에게 판 것인데 왜 안 베어 가느냐?’고 재촉하였다. 벌목꾼들이 ‘이 나무들은 안 베겠다’고 하자 산주가 직접 톱을 들고 나서서 나무를 베었다. 나무를 벤 산주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는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 이후는 그는 말도 못하고 누워서 지냈다. 마을 사람들이 문병을 가서 ‘산제당에 가서 빌어라. 나을 수도 있을지 모르니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라 라고’하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부축을 받으며 산제당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그 이후 그는 일어나서 조금씩 걷게 되었다. 그리고 부전대동계 임원을 찾아와 산제당이 위치한 장소 주변을 대동계에 매매하였다.” 이와 같이 산제당 주변을 훼손해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 일대 주민들은 산신령의 [신벌](/topic/신벌)로 생각한다. 그리고 산주의 속죄를 신령이 받아들여 역시 병을 낫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본래 산제당 주변의 터는 그동안 부전대동계에서 산주에게 여러 차례 매매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산주는 산제당 터만 떼어서 팔 경우 산의 모양이 좋지 않게 된다고 하여 팔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산제당 터를 대동계에 팔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산제당 터는 부전대동계의 자산이 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부전대동계에 의해 시행되고 있는 무성산산신제는 본래 부전동 일대 열두 마을의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지내던 제의였다. 1839년에 작성된 부전동 마을문서『부전대동계 입의ㆍ일』에는 당시 부전동산신제가 격식을 갖춘 유교제례 방식으로 시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 문서에는 “실 제관 세 명과 예비 제관 세명을 동계일에 선정한다”고 적고 있다. 예비 제관은 실 제관 가운데 부정한 일이나 유고가 있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들이 중심이 되어 [초헌](/topic/초헌), [독축](/topic/독축), [아헌](/topic/아헌), [종헌](/topic/종헌)의 순으로 제의를 시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이러한 관행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 과거 부전대동계가 주관한 무성산산신제는 상ㆍ하당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산신제의 제당인 무성산산제당이 상당이라고 한다면 내산리 입구의 천제(川祭) 제장이 하당이었다. 이 천제 제장은 내산리 입구의 약천내 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상ㆍ하당으로 이루어진 제당은 일제강점기 말부터 상당만이 운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약천내는 부전동 들을 적셔 주는 수원으로, 이 고장의 농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던 시내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부전대동계에서는 물의 독점을 막는 조례를 두기도 하였다. 이처럼 부전동 열두 마을에 농수로서 영향을 미쳐 온 수원이기에 마을 사람들은 약천내 상류 지역에 제장을 두고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이에 따라 하당에서는 주로 수원의 풍부함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면서 하당 제의가 단절되었다. 상ㆍ하당의 기원 내용이 중첩되기도 하고 두 차례에 걸친 제의 수행이 부담되어 하당 제의를 폐지한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한천저수지준공을 기념하여 한 차례 천제(川祭)를 지냈다. | 참고문헌 | [주당풀이](/topic/주당풀이)와 경문(blog.daum.net/kos8496/16175959) 浮田大洞# 立議 (1972) | 형태 | 무성산산제당은 무성산 상봉의 동남쪽에 위치한 상영천[마을](/topic/마을)의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1984년 이전에는 초가 형태의 6.6㎡ 남짓한 건물이었다. 이러한 외형상의 초라함을 개선하기 위해 부전대동계 임원들이 꾸준히 공주시에 자금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1984년 산제당 중수자금을 확보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확보된 자금을 사용하여 6.6㎡ 남짓한 규모의 목조 건물을 지었다. 통나무로 [기둥](/topic/기둥)과 상량을 들이고 벽면은 시멘트 블록으로 쌓았다. 그리고 시멘트로 마감한 다음 페인트로 채색하였다. [지붕](/topic/지붕)은 [기와](/topic/기와)를 얹어 건물 전체가 전통적인 [한옥](/topic/한옥)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물 내부 중앙에는 산신도를 걸어 놓았다. 산신도에는 좌정한 산신령과 호랑이를 나란히 배치하였고 산신령의 뒤편으로 선녀(仙人) 두 명을 그려 놓았다. 이 가운데 호랑이는 산신을 호위하는 영물로 볼 수 있고, 선녀는 산신령의 시중을 드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산신도는 또한 커다란 소나무와 계곡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산신령의 거처가 경관이 뛰어난 산중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밖에 산신도의 오른쪽에 ‘무성산 산신 신위(武盛山 山神 神位)’라고 종서(縱書)한 지방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 산신도와 지방 아래에는 목재로 제단을 가설하여 놓았다. 이 제단은 산신제를 치를 때 [제물](/topic/제물)을 차려 놓는 공간이다. 제단의 전면에는 상을 놓았고, 상 위에는 [향로](/topic/향로)가 놓여 있다. 제당 내부의 바닥은 시멘트로 처리하였으며, [장판](/topic/장판)을 깔아 사용하고 있다. 제당 건물 전면 입구에 「산신각(山神閣)」이라 양각한 [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제당이 완공될 당시에는 볼 수 없었으며, 건물이 완공되고 난 이후 1995년에 제작하여 걸어 놓은 것이다. 이는 현판의 한쪽에 적어 놓은 ‘을해 입춘절(乙亥 立春節)’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형태 | 무성산산제당은 무성산 상봉의 동남쪽에 위치한 상영천[마을](/topic/마을)의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1984년 이전에는 초가 형태의 6.6㎡ 남짓한 건물이었다. 이러한 외형상의 초라함을 개선하기 위해 부전대동계 임원들이 꾸준히 공주시에 자금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1984년 산제당 중수자금을 확보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확보된 자금을 사용하여 6.6㎡ 남짓한 규모의 목조 건물을 지었다. 통나무로 [기둥](/topic/기둥)과 상량을 들이고 벽면은 시멘트 블록으로 쌓았다. 그리고 시멘트로 마감한 다음 페인트로 채색하였다. [지붕](/topic/지붕)은 [기와](/topic/기와)를 얹어 건물 전체가 전통적인 [한옥](/topic/한옥)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물 내부 중앙에는 산신도를 걸어 놓았다. 산신도에는 좌정한 산신령과 호랑이를 나란히 배치하였고 산신령의 뒤편으로 선녀(仙人) 두 명을 그려 놓았다. 이 가운데 호랑이는 산신을 호위하는 영물로 볼 수 있고, 선녀는 산신령의 시중을 드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산신도는 또한 커다란 소나무와 계곡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산신령의 거처가 경관이 뛰어난 산중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밖에 산신도의 오른쪽에 ‘무성산 산신 신위(武盛山 山神 神位)’라고 종서(縱書)한 지방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 산신도와 지방 아래에는 목재로 제단을 가설하여 놓았다. 이 제단은 산신제를 치를 때 [제물](/topic/제물)을 차려 놓는 공간이다. 제단의 전면에는 상을 놓았고, 상 위에는 [향로](/topic/향로)가 놓여 있다. 제당 내부의 바닥은 시멘트로 처리하였으며, [장판](/topic/장판)을 깔아 사용하고 있다. 제당 건물 전면 입구에 「산신각(山神閣)」이라 양각한 [현판](/topic/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제당이 완공될 당시에는 볼 수 없었으며, 건물이 완공되고 난 이후 1995년에 제작하여 걸어 놓은 것이다. 이는 현판의 한쪽에 적어 놓은 ‘을해 입춘절(乙亥 立春節)’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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