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채씨 무계

한국무속신앙사전
진도의 채(蔡)씨 출계(出系)를 통해 전승되는 무업(巫業)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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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채(蔡)씨 출계(出系)를 통해 전승되는 무업(巫業)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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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만
정의진도의 채(蔡)씨 출계(出系)를 통해 전승되는 무업(巫業)의 계보.
내용1987년 국립민속박물관의 진도무속 현지조사에 따르면 당시 조사된 과거의 무계(巫系)와 그때까지 이어온 무계를 합쳐 14개 성씨의 친족집단이 진도에 분포되어 있었다. 채씨 무계는 그중 하나이다. 진도를 비롯하여 한국 서남부 지방에서는 세습무(世襲巫)가 주류를 이룬다. [신병](/topic/신병)(神病)을 앓고 [내림굿](/topic/내림굿)을 받으면 무당이 되는 강신무(降神巫) 전통과 달리 세습무는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출계집단을 따라 세습을 하여 무당이 된다. 한국 서남부 지방에서는 여성이 결혼하여 시가(媤家)에서 시어머니의 무업을 이어받는 세습무 전통이 일반적이다. 무당이 되는 것은 여성이지만 그 계통이 부계(父系) 출계를 따라 이어지는 것이다. 진도에서 통상 사용되는 ‘[단골](/topic/단골)’이라는 명칭은 무업이 세습된 무당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성이 단골이 되어 무당의 정체성을 잇고 무속 의례를 주재(主宰)한다. 남편은 부인과 함께 굿판에 다니면서 악기 연주를 맡는다. 이를 고인(鼓人)이라고 한다.

무업(巫業)이 남편 가계에 속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단골판’이 있다. 단골판은 신도(信徒)들이 분포해 있는 영역이자 단골에 대한 경제적 부양 단위이다. 이 단골판의 권리가 남편 쪽 가계에 속한다. 단골판은 단골이 지속적으로 굿을 해주는 신도 가정들로 이룬 권역이다. 한 단골이 능력에 따라 여러 단골판을 관리할 수 있다. 단골은 신도 가정에 씻김굿을 비롯한 여러 굿을 해주고 현장에서 현금과 제물(祭物)을 걷어 동료들과 나눈다. 이때 걷는 것들을 ‘마령’이라고 한다. 한편 [보리](/topic/보리)와 쌀 [수확](/topic/수확)기에는 단골판을 돌면서 곡식을 얻는다. 이 관행을 ‘도부’라고 한다. 봄철 도부와 가을철 도부가 일반적이다. 단골은 이때 성냥이나 과일 등 약간의 선물을 신도 가정에 증여한다. 이를 ‘이바지’라고 한다. 단골판의 신도 가정들과 단골 사이에는 이렇듯 의례와 현물을 매개로 한 지속적인 ‘단골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진도에서 채씨 무계의 유래는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현재까지 이른 과정도 확실치 않고 앞으로 채씨 친족 구성원들의 무업 계승 가능성도 확실치 않다. 근래에까지 무업을 한 고(故) [채계만](/topic/채계만)(전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topic/진도씻김굿) 기능보[유자](/topic/유자)) 가계(家系)의 경우 그의 8대조 채걸합이 현 신안군 비금도에서 이주하여 이 가계의 입도조(入島祖)가 되었다. 채걸합의 구씨(具氏)와 김씨(金氏) 부인 중 김씨가 무계 출신인 것으로 전해지지만 남편 채씨의 집안이 무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현재 진도 무속의 주요 실행자인 채정례(여, 1924년, 진도군 의신면 원두리)는 사실은 채씨 가계가 아니라 남편 함씨의 가계에 속한다. 그녀의 부친 채백주는 진도에서 그의 무계 가계를 마감한 인물이다. 현 신안군 신의면 상태리에 거주했던 채백주 가계의 경우 조상 어느 대(代)부터 무업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단골인 부인 임득춘과 현 신의도에서 무업을 하였으며, 채정례가 일곱 살 나던 해에 1남 3녀를 데리고 진도로 이주하였다. 그는 아들 한 명이 질병으로 사망하자 하의도 생활에 염증을 느꼈고, 당시 친가와 외가 쪽 친족원이 많이 살고 있던 진도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채백주 부부는 진도로 이주해서도 무업을 하여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이후 딸 셋은 무계로 시집가서 단골이 되었으나 막내인 아들 채동수는 채씨의 무업을 계승하지 않아 채백주 무계가 끊겼다. 부계 출계집단으로서의 진도 채씨 무계는 그 전체적인 모습이 밝혀지지 않았고 앞으로의 계승도 불확실하다. 한편 채정례와 작고한 그녀의 두 언니 채자녜(채자녀), 채둔굴은 비록 다른 무계로 시집을 가서 무업을 하였지만 진도 무속의 계승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세습무 전통을 이해하는 데 많은 자료를 남기고 있어서 이에 관해 수록할 필요가 있다.

채자녜는 진도에서 19세에 결혼하였다. 이후 2남 3녀 중 딸 하나만 남고 모두 사망하자 남편과 [이혼](/topic/이혼)하고 목포로 나가 행상을 했다. 그러다가 33세 때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무업을 시작한다. 그녀의 굿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들은 어머니의 전통으로, 신안군에서 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이다. 이후 그녀의 딸이 12, 13살 나던 해에 다시 진도로 들어 와 무계 집안의 김원선과 [재혼](/topic/재혼)하였다. 김원선은 무계 집안이지만 한약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그녀 혼자서 무업을 이끌었다. 그녀는 남편이 물려받은 95호 가량 되는 단골 가정들과 새로이 무업을 하면서 사들인 100호 가량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나이가 들면서 무업을 하지 않게 되자 단골판이 유명무실해졌으며 작고한 이후에 끊겼다. 채자녜의 경우는 경제적 궁핍이 무업을 수행하도록 이끄는 세습무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채자녀의 동생 채둔굴은 단골판 경영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 준다. 무계의 강홍섭와 결혼하여 약간의 무업과 농사, 어업을 하다가 생활고 때문에 남편과 함께 친정으로 들어가 7년에 걸쳐 굿을 다시 배웠다. 이후 부부가 무업으로 단골판을 늘려가면서 집안 살림을 이끌었고, 남편이 작고한 이 후에는 아들이 고인으로서 굿 반주를 하였다. 무업 계승에 열성적이었던 채둔굴은 며느리에게도 굿을 가르치려 하였으나 며느리가 마다하여 채씨가 작고한 후 대가 끊겼다. 채둔굴은 단골판을 늘려나가는 데 남다른 수완을 보였다. 진도군 지산면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모두 합쳐 500호가 넘는 단골판을 관리한 채둔굴은 특히 1950년 12월 20일 거제리를 비롯한 333호를 마련할 때의 기록인 ‘당골기’를 남겼다. 이 기록을 보면 진도군에 사는 가정 외에도 서울, 목포, 광주의 가정들도 들어 있어 단골관계가 진도를 떠난 가정과도 이어졌음을 알게 해준다.

채정례 역시 함인천(남, 1925년 생)과 결혼하여 무업으로 함씨 집안을 일으킨 경우이다. 결혼 이후 당분간은 부부가 남의 소를 길러 주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워낙 궁핍한 형편 때문에 부부가 무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함씨가 차남이기 때문에 물려받은 단골판이 없어 채씨가 친정 부모와 남동생으로부터 단골판을 얻고 본인이 늘려나가 살림을 일으켰다. 채정례의 굿 역시 대부분은 어머니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특별히 배운 바 없이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해 재현한 것이다. 또한 틈틈이 언니 채자녜가 행하는 굿을 보고 익히는 능력을 길렀다.

이와 같이 채정례 세 자매는 다른 집안의 무계를 이었지만 이들의 굿은 어렸을 때 보고 듣고 배운 채씨 무계의 전통을 재현한 것이다. 친정 부모로부터 다시 배워 익힌 것이다. 현재 채정례가 혼자 남아 이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세 자매는 모두 무업을 하는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신분과 경제생활 때문에 무계들 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지는, 통혼(通婚) 범위의 제한성을 세 자매가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 궁핍 때문에 무업을 시작하고 단골판을 늘려 시집 살림을 일으키는 채씨 자매의 모습은 세습무 가계의 경제적 생존 과정을 잘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문헌진도군의 문화유적 (목[포대](/topic/포대)학교박물관, 전라남도 진도군, 1987)
진도무속현지조사 (국립민속박물관, 1987)
민속원한국의 굿 1-인천지역편이선주1996
민속원한국의 굿 2-서울, 인천, 경기편이선주1996
경기도 도당굿김헌선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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